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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나주 개선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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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과 전라도사람들

 

임진왜란

권율과 전라도 사람들

 

권율(權慄)은 튼튼한 장정을 골라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시킨 다음 1592922(양력 10, 26) 직접 근왕군을 이끌고 전주에서 출발하기에 이른다.

이때 각 고을의 수령과 승장 처영(處英)도 같이 참전했다. 난중잡록 : 조경남

 

당시 부대편성은 다음과 같다.

좌부장 : 신여랑(고흥)

우부장 : 안상보(고흥)

찬획(贊劃) : 노인(나주), 함덕립(보성), 김율(장흥)

참좌(參佐) : 김두남(고창), 김지남(고창)

의병청 양향유사(糧餉有司) : 박장경(담양), 박인경(담양)

운량유사(運糧有司) : 고성후(광주), 신민겸(곡성), 최희열(나주), 홍천경(나주)

 

전투부 주장 : 선거이(보성)

전투부장 :

김극추(광주), 이세환(광주), 이완근(광주), 이충립(광주), 양대박(나주),

오계수(나주), 이광선(나주), 윤호민(담양), 전   봉(담양), 도맹삼(고흥),

신여극(고흥), 류충서(고흥), 류   순(고흥), 정수인(고흥), 박응현(보성),

고세충(화순), 손종걸(화순), 김여건(장흥), 김여숙(장흥), 위공달(장흥),

위덕원(장흥), 정현룡(장흥), 김응종(강진), 박계원(영암), 박광년(영암),

이인걸(영암), 윤   길(무안), 채종해(무안), 주   봉(무안), 이영복(군산),

김   흔(정읍), 두기문(김제), 조여충(완주), 최영길(완주), 김익수(고창),

김   진(고창), 김팽수(고창), 처   영(김제),​ 의승장(영규대사),

 

이들은 전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2차 근왕군 좌종대가 출발하던 노선을 택해 북으로 진군했다. 929일 익산에 도착한 뒤 23일 머무르다가 다시 정예병을 뽑아 충청도 내지를 거쳐 아산으로 향했다. 쇄미록

 

난중잡록(亂中雜錄)

 

조선시대사 문헌 문화재 남원의병장 조경남이 임진정유 양란 당시의 상황과 국내 외 정세 등을 기록한 야사집.

 

시도 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전라북도

종목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19840920일 지정)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시

 

정의

남원의병장 조경남이 임진정유 양란 당시의 상황과 국내 외 정세 등을 기록한 야사집.

 

서지적 사항 / 42. 필사본.

 

저자가 13세 때인 1582(선조 15) 12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1610(광해군 2)까지 중요한 사실을 엮은 것이다. ‘난중잡록이라 이름한 것은 임진정유 두 차례의 난의 기록이 주요 부문을 차지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뿐 아니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중에 특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수록한 자료 가운데는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의 기록이 대부분 실려 있다. 전쟁 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에는 사건 기록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때에는 필요하지 않은 기록은 적지 않아 적은 분량이다.

 

그 후손에게 보존된 초본에 의하면 제1권은 158215927월 사이, 2권은 1592815936월 사이, 3권은 15937159812월 사이, 4권은 1599116102월 사이로 나누어 편찬되어 42책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19649월에 속잡록(續雜錄)42책을 추가시켜 전 84책으로 늘렸다. 이것의 책머리에는 기정진(奇正鎭)최시옹(崔是翁)과 저자의 서문을, 끝에는 한익철(韓翊哲)의 발문과 저자의 11대 종손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를 붙여서 후손들이 석판으로 간행, 반포하였다.

 

이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이 사료(史料)로 참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본을 작성해 정부에 보관하고, 원본은 1657(효종 8)에 본가에 돌려주었다 한다. 그 뒤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대동야승을 간행할 때 제26권부터 제34권까지 9편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은 정부에 보존되었던 부본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그 당시에 표기한 명칭 이외에 속잡록을 합하여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임진왜란사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당쟁 · 외교 · 군사 등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 의해 번역, 반포되었다.

 

참고문헌

난중잡록해제(亂中雜錄解題)(최규성, 국역 대동야승, 1971)

 

관련 항목

임진왜란 조선시대사 사건 1592(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정유재란 조선시대사 사건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정유년(1597)에 다시 침략한 전쟁.

기정진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정자설, 이통설, 노사집, 답문유편등 중요한 성리학 저술을 남긴 학자.

인조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16(재위: 1623~1649) 국왕.

선조수정실록 조선시대사 문헌 조선전기 제14대 왕 선조의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선조실록을 수정한 실록.

대동야승 구비문학 문헌 조선시대 야사 · 일화 · 소화 · 만록 · 수필 등을 모아 엮은 종합서. 야사집.

민족문화추진회 유교 단체 민족 문화의 보전 · 전승 · 계발 · 연구를 추진하여 민족 문화의 진흥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1965년 서울에서 민간 단체로 발족 된 재단법인.

 

국민들에게 두 가지 날짜를 물어보고 싶다.

첫째, 매년 '214'이 무슨 날인지?

둘째, 매년 '428'은 또 무슨 날인지?

 

불행하게도 214일을 '발렌타인데이'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그날이 우리나라의 영웅이신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감옥에 수감되어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날임을 기억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428일은 우리의 영원한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태어나신 날이다. 지난 일요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이었으나 그날을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는 굳은 의지로 실천을 다짐할 때 흔히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한다. 이를 한자성어(漢字成語)'지천위서(指天爲誓)'라고 표현하며 즐겨 쓰기도 한다.

 

여기서 '맹세'라 할 때의 '()'''로 굳어져 읽힌다. 이는 '전장에 나갈 때 승리를 다짐하며 나무를 꺾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寒山島月明夜(한산도월명야) 한산섬 달 밝은 밤에

上戍樓撫大刀(상수루무대도) 수루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며

深愁時何處一(심수시하처일) 깊은 시름에 잠겨있을 제 어디서 한 가락

聲羌笛更添愁(성강적갱첨수) 피리 소리가 다시 시름을 더 하는고

 

본 시조는 이순신(李舜臣)장군(將軍)'한산도가(閑山島歌)'이다.

 

이 시조를 볼 때 싸움에 임하기 전 장군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天步西門遠(천보서문원) (선조)의 행차는 서쪽(의주)으로 멀어져 가고

東宮北地危(동궁북지위) 왕자는 북쪽 땅(평양 이남)에서 위태롭다.

孤臣憂國日(고신우국일) 외로운 신하는 나라를 걱정할 때이고

壯士樹勳時(장사수훈시) 사나이는 공훈을 세워야 할 시기로다.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는구나,

讐夷如盡滅(수이여진멸) 원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수사불위사) 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

 

이 시()는 충무공 이순신의 한시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를 줄인 말로 '서해맹산(誓海盟山)'이라 한다.

 

이는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라는 뜻으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이 깊이 담겨져 있다.

 

장군의 시() '진중음(陣中吟)'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수록되어 있고, 의병장(義兵將)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같은 구절이 전한다.

 

바다()와 산()은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장엄한 신()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바다와 산에 맹세함은 어떠한 경우라도 어길 수 없는 인간(人間)과 신()과의 약속이다.

 

조선 선조(宣祖, 1592) 때 왜군(倭軍)이 물밀듯이 쳐들어와 조선을 거의 점령하기 직전 왜군수군(倭軍水軍)의 진로(進路)를 막아 절체절명의 조국(祖國)을 구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이는 왜적이 동래(東萊)를 유린하고 보름 만에 한성(漢城/ 서울)을 위협하자 왕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감)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니 결국 장군이 나라를 지킨 것이지만 다름없다.

 

또 다른 측면의 이순신 장군을 기억해 보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7년간의 기나긴 전쟁 중 장군은 무려 26회의 출전이 있었다. 놀랍게도 26전승이었다. 세계 어느 전사에도 이러한 무훈(武勳)의 기록은 없다.

 

우리는 가끔 일상생활 중 바쁠 때 중요한 일을 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조국(祖國)을 목숨 바쳐 구한 구국성웅(救國聖雄)의 탄신일(誕辰日)을 잊는다는 것은 한량없이 부끄러운 자화상(自畵像)이 될 것이다.

 

장군의 구국 의지와 신념은 그의 명언 중에 잘 나타나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勿令妄動靜中如山(물령망동정중여산/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戰方急愼勿言我死(전방급신물언아사/전투가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必死則生必生則死(필사즉생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國必自伐而後 外寇伐之[국필자벌이후 외구벌지/나라는 반드시 자신들이 친(내부 분열) 이후 외국 군대가 침범한다.)'라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지도자나 정치하시는 분들은 '天下雖安忘戰必危[천하수안망전필위/천하가 비록 편안하다 해도 전쟁을 잊고 있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위태롭다]'라는 말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며, 국민 모두는 나라를 위한 역사적 날짜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장상현/인문학 교수